물 건너온 영화

“문명이 사라지면 인간은 짐승이 된다 – 영화 ‘파리 대왕’이 보여준 지옥”

DIAMONDRAGON 2025. 3. 15. 19:00

원제: Lord of the Flies
감독: 해리 후커 (Harry Hook)
원작: 윌리엄 골딩(Wiliam Golding)의 동명 소설 《Lord of the Flies》 (1954)
개봉: 1990년 3월 16일
장르: 드라마, 서스펜스, 심리
러닝타임: 90분
주요 출연진:

  • 발트로미 부메스터 (랄프)
  • 크리스 퍼시 (잭)
  • 댄 피퍼만 (피기)
  • 제임스 배지 데일 (사이먼)

어릴 적,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TV에서 우연히 '파리 대왕(1990)'을 보았다. 작은 몸에 큰 가방을 메고 학교를 오가던 나에게 이 영화는 이해하기 어려운 혼란스러운 이야기였다. 어린아이들이 무인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설정은 흥미로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난폭해지고 서로를 공격하는 모습이 너무 무섭고 충격적이었다.

그때의 나는 단순히 '이 아이들은 왜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라는 의문을 가질 뿐이었다. 랄프와 피기 같은 아이들은 친구를 위해 싸우려 했지만, 잭과 그의 무리는 점점 괴물처럼 변해갔다. 특히, 피기가 바위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은 너무도 충격적이어서 한동안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어린 나에게 '이 영화는 나쁜 영화야, 무섭기만 해'라는 감정만 남겼다.

하지만 지금, 어른이 되어 다시 '파리 대왕'을 보니 그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들었다. 무섭다고만 여겼던 장면들이 인간 본성을 투영한 깊은 상징으로 다가왔고, 어릴 때 몰랐던 철학적 메시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인도라는 환경은 단순한 생존 게임이 아니라, 문명의 질서가 사라졌을 때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험이었다. 사회가 제공하는 규율과 도덕이 사라졌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권력을 탐하고 약자를 지배하려 한다. 랄프는 민주적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잭과 그의 무리는 점점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섬을 장악해 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어릴 때 잭의 편에 섰던 것 같다. 피기는 너무 약해 보였고, 랄프는 결단력이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보니 피기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였으며, 그의 죽음은 인간이 이성을 버릴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영화에서 피기가 랄프에게 했던 말이 깊이 남는다.

"Which is better—to have rules and agree, or to hunt and kill?"
(규칙을 만들고 따르는 것이 더 나은가, 아니면 사냥하고 죽이는 것이 더 나은가?)

 

이 대사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를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문명과 야만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사회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어린 시절에는 단순한 모험 이야기처럼 보였던 이 영화가 이제는 인간 사회와 권력 구조를 날카롭게 해부하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우리 주변에서도 '문명'이라는 틀 속에서 간신히 가려져 있던 본능이 어떤 순간에는 표출되기도 한다. 직장에서, 정치에서, 심지어 작은 커뮤니티에서도 우리는 종종 '파리 대왕' 속 소년들의 모습을 본다.

어릴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이 영화가 이제는 너무도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결국, 우리는 이 무인도를 떠난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문명의 규칙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랄프처럼 살아갈 수 있지만, 언제든 잭처럼 변할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 두렵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헬기와 구조대원은 이 모든 광기의 끝을 알리는 신호처럼 보인다. 무인도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서로를 향해 창을 겨누던 아이들은 헬기를 본 순간, 문명 세계로부터의 강렬한 충격을 받는다. 광기에 휩싸여 있던 아이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문명의 보호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I should have thought that a pack of British boys would have been able to put up a better show than that."
(영국 소년들이 이 정도밖에 못할 줄은 몰랐는데.) – 구조대원

구조대원의 이 한마디는 모든 것을 요약한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이 결국 본능과 야만의 세계로 회귀해버린 사실은 인간의 이중성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도 결국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던져준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와 지금 느끼는 감정의 차이는 단순히 나이가 들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아마도, 진정한 성장은 세상을 더 복잡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순간이 아닐까? '파리 대왕'은 내 어린 시절과 지금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은 영화다. 그리고 나는 이 다리를 건너며, 어릴 때는 보이지 않던 풍경을 발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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